10.1.14

Design


DESIGN IN KOREA

한국의 디자인은 상업적인 디자인을 지향한다.
이는 한국의 디자인교육에서부터 시작 된다. 물론 한국 사회에도 원인이 있을 뿐더러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 되는 부분은 디자인 교육이다. 한국의 디자인교육자체또한 상업디자인을 배우는 과정이다. 상업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바로 상업적인 목적으로만 디자인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제품실현 가능성이 있는 이러한 디자인을 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받고 디자인 실습을 하게 된다 회사는 더욱어 상업적인 디자인을 위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결국 초보 디자이너들은 상업적인 디자인만이 익숙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전문 디자이너가 되기위해 디자인 툴을 배우고 디자인 테크닉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학교의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고 필수 과목인것들도 있을 정도 이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것이 디자이너에게 필수인것인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자.
디자인 테크닉? 기본적인 그림실력만 있다면 짧은 시간내에 획득할수 잇는 부분이다. 디자인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한달내에도 마스터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것들도 생각 어떠한 아이디어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디자인은 기계처럼 컴퓨터에서 3D툴을 다루고 그림을 찍어내듯 그려 내는 것을 보고 우리는 디자인이라고 하고 있다.
디자인이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을 해본사람은 디자이너이지만 많지 않다. 디자인은 저런 그림을 찍어 내는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닌 무엇인가를 설계를 하고 계획을 하는 것이다. 진정한 디자이너들은 많지가 않다. 반쪽짜리 디자이너이다.
이제 바뀌어야 한다. 테크닉 보다는 우선 생각 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생각은 모든 것의 기본이고 시작이다. 아마 다들 이런 생각을 할것이다. "생각? 그게 뭐가 어려워?" 생각은 생각 하는 것 보다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생활과 사람들의 통념에의해 오염되어 있다. 즉 생각에 한계가 생겨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창의성과 연결이 되는 부분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한계를 만들어 냈지만 그 한계를 깨버리는것은 힘든 일이다. 우리가 생각 한다는것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을 할수 잇는 범위내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생각의 획일화이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곳에서는 자신을 구별할수 잇는 방법이 없다. 여기에는 자유가 없다. 우리 디자이너들의 의무는 이러한 한계의 틀을 조금씩 깨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계획과 설계하에 이루어 져야 한다.이러한 행동이 "디자인을 한다"이다. 밑 바탕에는 이런 기본 바탕이 깔려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디자인 교육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교육을 거의 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한국의 디자인은 순수예술과 다른길을 달려 왔고 한국 디자인의 뿌리 또한 순수 미술보다는 외국의 디자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순수미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디자인 자체가 순수미술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순수 미술의 영향이 큰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디자인은 늦게 출발하여 외국의 디자인을 모방하면서 성장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생각을 보여 주기 보다는 자신의 스킬이나 표현력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이 부분이 한국 디자인의 가장 큰 약점이다. 한국에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활동하고 있고 디자인회사가 있지만 그 중에 디자이너로서 세계 속에 인정을 받을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이는 사회성향과도 연결이 되는 부분이다. 한국의 사회성향은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 한다. 안정적인 삶을 가장큰 이상으로 삼고 살아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성향이 그대로 사회에 묻어나게 되고 상업 활동에도 적용이 된다. 그래서 기업들은 검증되고 안정성 있는 디자인과 제품들을 선호 하게 된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창의력은 배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안정적인것을 만든다는 것은 이미 검증이 된 부분을 리모델링을 한다는 것과 같다. 새로운것은 그만큼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배척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디자인행위를 멈추어서는 않된다.
요즘 디자인의 중요성이 재조명 받으며 디자인을 경영에 끌어 들이는 기업들이 많이 생겨 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디자인 경영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한체 트렌드 처럼 디자인경영을 앞으로 내새운다. 혹은 디자인을 모든것의 상위로 놓고 디자인만을 강조한 기업들도 있다. 디지인은 절대적이 아니다. 디자인은 기업이 소비자에게 전하려는 메세지를 대신하는 많은 도구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디자인 경영이라는것는 존재 하지 않는것이다.
이러한 사회풍토가 몇가지 부족한 디자이너들을 양성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에 안주하고 있어서는 않된다는것을 알려 주고 싶다. 디자이너라면 스스로 자신의 생각의 벽을 허물어가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분야뿐만아니라 시회전체 그리고 세계에 존재 하는 모든것에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파해쳐 가야한다. 디자이너에게 흥미로운 무엇인가가 없어 진다면 죽은것이다.
한번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대하여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Samsung


Samsung.

지금의 삼성은 디지털 가전을 주력 상품으로 시장의 점유율을 높으려고 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부분은 아마도 스마트폰과 PC 그리고 TV분야일 것이다.
국내 기업으로는 디지털 가전으로 세계시장에서 선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디지털 산업은 하루하루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성의 지금의 행보와 앞으로의 행보를 예측 해볼때 삼성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지금의 삼성은 하드웨어부분에서는 세계에서 알아 줄 정도로 지금까지 쌓아 놓은 커리어는 대단하다. 하지만 정말 좋은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지만 그이상의 매리트는 없는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디자인의 변화를 주려는 의도인지 전 BMW의 디자인 총괄책임자였던 크리스뱅글을 영입을 하였다. 크리스 뱅글은 BMW를 지금까지 끌어 올린 자동차 쪽에서는 세계에서 알아 주는 디자이너 이다. 크리스 뱅글을 영입 함으로서 삼성이 얻을수 있는 이득으로는 아마도 지금까지는 디자인이 뒤죽박죽 정신없고 어떠한 아이덴티티가 없었던 삼성의 디자인이 한단계 진보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마치 애플의 디자인처럼 확실한 아이덴티티로 삼성디자인이 변보하게 될수있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세계시장의 Apple, Google, MS와 대항 해서 승산이 낮은것이 사실이다. 삼성의 해외 인지도는 한국에서 느끼는 삼성의 인지도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것이 사실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인가? 아주 사소한것이 이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 Apple,Google과 삼성이 다른점은 무엇인가? 애플과 구글은 자신들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제품을 만들고 기업을 운영해 간다. 그럼으로서 사용자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이에 사용자들이 반응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업들의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중요하게 생각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것은 생각으로 부터 시작 하는 것이다. 확고한 생각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수 없는것이다. 확고하게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과 다른사람들을 따라서 행동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바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생각이 무엇일지 궁금하고 신선하게 사람들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생각! 이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리고 철학을 담는 다는 것은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차별화가 시작 되는 것이다. 기업이 하는 이야기에 긍정적인 사람은 바로 잠재적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전형적인 예가 바로 애플과 구글이다.
하지만 삼성은 사용자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것 같다. 정말 삼성이라는 큰 기업이 기업 아이덴티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삼성의 철학보다는 나는 이쁘다 그리고 성능도 좋다 그러니 사라. 이런 말만 줄줄이 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 보다는 제품의 이야기만을 한다. 이부분이 바로 애플, 구글과 삼성의 사소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차이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이를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뒷쳐질수 밖에 없다.
앞으로 디지털 산업은 하드웨어 보다는 소프트웨어과 서비스싸움이다.  애플이 어떻게 지금의 위치에 까지 왔는가를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 이유가 있다. 애플은 자신들의 사용자를 제품을 사는 사람으로만 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가족처럼 생각을 하고 자신들의 제품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사용할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그리고 애플의 하드웨어는 죄상급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최상급의 하드웨어를 갖춘 다른 다른보다 비싼 애플제품을 사용한다. 그것은 애플소프트웨어가 가지는 편리함때문이다. 이제 하드웨어는 기본적으로 갖춰지는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차별화를 주고 어떤 부분에서 사람들을 만족 시킬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구글의 모토로라인수로 사람들은 삼성이 아마도 윈도우폰생산을 늘릴것 이라고 예측을 하고 있다. 만약 MS사가 다른 휴대폰회사를 통합 한다면 삼성은 낙동강 오리알신세를 면치 못할것이다. MS사는 언젠가 휴대폰 회사를 인수할 것이다.  그리고 구글도 안드로이드제공을 제한적으로 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한순간에 삼성은 스마트폰산업에서 도퇴되고 말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성이 애플, 구글, MS의 삼강체제에서 살아 남을수 있을까?
일단 삼성의 철학부터 다시 점검해봐야 한다. 사람들에게 삼성이 어떻게 기억되고 인식되기를 원하는지 다시 점검해볼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하드웨어개발뿐만 아니라 이제 소프트웨어개발에도 집중 투자를 해가야 한다. 지금 삼성의 OS인 바다를 지금보다 개선을 해서 ISC, IOS, Window에 뒤지지않게 개발을 해야 한다. 그래서 안드로이드폰, 윈도우폰 보다는 바다폰의 공급을 늘려가고 개선을 해나아가야 한다. 분명 바다폰을 좀 더 쉽게 공급 하려면 앱개발또한 시급한 부분이다. 애플스토어와 안드로이드는 오랜 시간동안 앱을 축척해왔고 개선해 왔기때문에 지금 당장 따라 잡기는 어렵다. 하지만 향후 몇년앞을 생각 하며 꾸준히 개발하고 공급해가야 할부분이다.
디자인은 삼성만의 아이덴티티를 담은 디자인이 필요 하다. 시중에 나가 보면 삼성디자인은 애플 혹은 다른 회사의 디자인과 큰 차이를 느낄수 없지만 디자인 자체는 훌륭하다. 하지만 디자인이 훌륭함에도 사람들은 삼성과 애플중 선택한다면 많은사람들은 애플을 선택 한다. 즉 삼성의 디자인이 자신의 역활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애플하면 직관적이고 고급스러움을, 벤츠하면 전통적이고 다이나믹한 디자인을 떠올린다.
하지만 삼성의 제품에는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아이덴티티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 수 록 소비자들에게 금방 잊혀 진다. 오히려 애플은 디자인에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확실하게 표출되고 있어서 누구나 잠깐 애플을 보는 것 만으로도 애플이 말하고자 하는 아이덴티티를 무의식적으로 인식하며 어느세 애플의 아이덴티티에 의해 자신 또한 제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애착을 가지게 된다.
삼성이 한 단계 두 단계 도약 하기 위헤서는 자신들이 소비자들에게 보여주고자하는 미래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미래를 경험하게 할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삼성이 세계 디지털산업의 정점에 서는 날을 기대해 본다.

Apple vs Google


Galaxy Nexus

Iphone 4s


아이폰은 애플에서 독자적으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적용한 애플폰이다.
 애플은 원래 컴퓨터 회사였다. 하지만 애플은 컴퓨터에만 국한된것이 아닌 MP3, 핸드폰, TV등 여러 사업으로 확장시켰고 그 결과는 세계의 IT선두주자가 되었다.  이런 애플의 디자인 철학은 통합이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런 관점에 의해 IMAC이 나오게 된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IPOD를 통해 핸드폰 시장의 가능성을 확인 했고 IPHONE 씨리즈로 이어 졌다 그리고 IPAD까지 애플이 내놓은 것은 연이어 히트를 쳤다. 애플의 디자인 철학은 그 영향력이 강하다. 통합을 위해 애플은 기존의 핸드폰에서 볼수 있는 이음새와 나사를 최소화 하였다. 이 부분이 다른 회사의 디자인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이렇게 이음새와 나사를 최소화 한다는 것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만드는 공정도 복잡해 진다. 하지만 애플은 디자인에 기술을 맞추는 정말 디자인 경영의 대표적인 회사이다. 외형적인 통합을 한 애플은 또 소프트웨어를 통해 통합을 시도 했다. 바로 MAC OS 를 기반으로 한 소프트 웨어를  IPHONE과 IPAD, IPOD에 적용한것이다. 이로 인해 애플 제품들간의 소통과 통합으로 나가가게 된것이다. 즉 애플 제품들 간에 서로 통한다. 즉 하나가 된다를 이루어 낸것이다. 우리가 애플의 제품을 항상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애플은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마치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야. 우리가 보여주고 들려주고 느끼게 해주고 싶은것은 이거다. 라고 제품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통합의 이면에는 단점도 존재 한다. 바로 창의력의 억제 이다. 애플이라는 제품들은 닫힌 생각을 하게끔 한다. 이는 애플이라는 회사가 가지는 성향과 같다. 그들은 항상 독자적인 노선으로 지금의 자리에 왔다. 그들이 직접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하드웨어를 만들고 디자인한다. 이러한 요인이 바로 제품에도 투영이 되는 것이다.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애플의 제품을 보면 변화가 없다,  즉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제품을 만드는 디자인 하면 우리는 그 디자인에 맞추어 사용한다. 하지만 애플을 한번 접하면 빠져 나가기는 어렵다. 마치 마약과 같다. 하지만 이것이 함정이다. 마치 "우리가 이런것은 만들었으니 너희는 잘 써"이런식이다. 애플이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우리가 너희들이 무엇을 필요할지 생각해 봣고 그래서 이것을 만들었으니 써라. 라고 하는듯 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사용자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애플에 노예가 되어 창의력을 상실해 간다.

넥서스는 구글에서 삼성으로부터 하드웨어공급을 받아 구글 자체 소프트웨어를 적용한 구글 폰이다.
구굴의 원류는 바로 인터넷 사이트 들을 이어 주는 포탈 사이트이다. 구글은 빠르게 인터넷을 점령해 갔다. 구글이 이렇게 성장할수 있었던것은 기업철학이다. 구글은 소통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소통은 연결이다. 즉 구글은 사용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연결통로역활을 하는 샘이다.우리는 너희들에게 여러가지를 제공 하고 있지만 사용할지 안할지는 너희들의 결정이다. 라고 하는듯한 구굴의 경영방식은 지금의 구굴의 위치에 까지 올려 놓은 것이다. 구글은 포탈 사이트이다 하지만 기존의 포탈사이트와는 차별화 되었다. 구글은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 Youtube, Google Map등의 회사와 연계로 다른 사이트와 차별점을 주었고 사용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사용하게 만든것이다. 하지만 구글은 인터넷이 가진 한계때문에 스마트폰 사업에 진출하게 되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인수하여 APP개발과 HTC, 삼성과 합작한 레퍼런스폰으로 스마트폰 사업에 뛰어 들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다른 스마트폰회사들에게 공급을 하였고 애플과 다르게 개방을 하였다. 이로 인해 안드로이드마켓이 애플 앱스토어를 위협할 정도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구글은 직접 휴대폰을 제조 하기로 마음을 먹고 HTC와 합작을 하여 넥서스원을 출시 하였다. HTC의 하드웨어와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고 삼성과 넥서스S를  통해 구글폰을 알릴수 있었다. 그후 모토로라를 인수 하고 또다시 삼성과 합작한 갤럭시 넥서스를 출시 하였다. 갤럭시 넥서스는 구글폰이란 바로 이거다 . 지금까지 우리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지금 스마트폰 시장은 애플과 삼성이 점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다. 내가 생각 할때 구글은 몇년안에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것이다. 구글폰을 처음 봤을때 그저 그런 너도나도 스마트폰경쟁에 뛰어 들듯이 구글도 뛰어 든듯 했다. 하지만 갤럭시 넥서스를 본후 구글폰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구글 폰은 역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스스로 필요 한것을 찾고 생각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글의 철학을 우리에게 말을 한다. 우리는 너희들에게 이 핸드폰을 만들어서 줬다. 이제 너희들이 알아서 꾸미고 만들어라.
우리는 너희에게 컵을 만들어 주었으니 너희들이 컵으로 콜라를 마시든 술을 마시든 그것은 너희들이 할일이다.

만약 이렇게 서로 발전해 간다면 내가 한표를 주고 싶은 회사는 구글이다. 어떤 제품이라는 것은 도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가치로 다가 오는 것이다. 도구를 넘어서 통제를 해온다면 우리는 많은것을 잃게 된다. 지금세계는 빠른 문명화와 편리함에 빠져서 중요한것을 잊어 가고 있다., 지금우리에게 가장 필요 한것은 편리함 보다는 생각이다. 생각을 하지 않는 편리함은  우리를 획일화 시킨다. 생각을 하는 편리함은 우리를 다양화 시킨다. 이제 제품도 무조건 적인 편리함 보다는 사용자가 생각을 하고 편리하게 이용 할수 있는 제품이 필요 하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정말로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일까?




하이브리드 자동차란 디젤엔진과 전기동력을 혼합하여 적은양의 리터로 2배에서 3배 이상의 거리를 갈수 있는 자동차이다. 뿐만 아니라 약 30%의 탄소 배출을 줄일수 있어 요즘 환경과 경제성 때문에 각광 받고 있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일까? 

하이브리드의 탄소 배출양은 기존의 자동차 보다 약 30%적게 배출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자동차에 비해 약 2/3의 수준의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수치를 보면 분명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경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탄소배출을 줄인다고 할수 있는 것인지 아직 의문점이 많다. 위에서의 수치는 그저 자동차 주행상의 탄소 배출양에 대한 수치 일뿐 자동차가 제조되는데 배출되는 탄소배출양과 전기생산에 사용되는 탄소배출양은 배제한 상업적 광고일 뿐이다.
또한 하이브리드자동차는 기존의 자동차가격에 비해 약 500만원이상 비싸고 
자동차 시장 조사업체인 트루카 자료에 따르면 자동차인 프리우스와 링컨 MKZ은 2년을 타야 일반 차를 구입한 것과 비교해 기름값 절감 효과를 볼 수 있고 2년이상을 타야 경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트루카는 자동차 구매자가 연간 2414.016km을 운행하고 휘발유 가격이 1L당 1150원을 밑돌 때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휘발유 가격이 이보다 더 오를 경우 이 시기는 더 길어질 것이고 휘발유 가격이 1L당   1438원이라고 가정할 경우 포드의 퓨전은 6년 반, 도요타의 캠리와 현대자동차의 쏘나타, 기아의 옵티마 등은 4년이 걸려야 연료비 절약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우리나라의 유류의 가격 상승폭으로 보자면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통해 기름값 절감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약 6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며 이는 자동차의 성능과 세계 유가의 변동에 크게 좌우 된다.  

나의 주관적인 관점에서는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가격이 기존의 자동차의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 되지 않는 이상 경제적인 차라고 할수 없고 그렇다고 친환경적인 자동차라고 할 수 없다. 그저 탄소배출량을 조금 줄였을 뿐이지 여전히 자동차에는 화석연료가 주요 원료이며 전기생상에도 화석연료는 중요한 자원이다.  
 전기자동차의 생산공정에서 탄소배출량은 일반 디젤 자동차와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반 디젤자동차가 생산되고 폐기되기까지 배출하는 탄소양은 24t이고 하이브리드는 21t, 전기자동차는 19t으로 약 6t의 탄소배출량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전기자동차가 상용화 되고 전세계의 인구가 전기 자동차를 이용한다면 또다른 환경문제가 발생 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전기 자동차를 이용하게 되면 인류가 하루에 소비하는 전력량은 엄청날 것이고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수많은 핵융합발전소를 건설하고 화력 발전을 위한 화석연료 또한 여전히 소모할 것이며 자연을 훼손하면서 수력 발전, 태양렬 발전등의 설비를 늘려 나갈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24시간 전자파에 대하여 노출되는 생활속에서 새로운 문제점이 생겨날 것이다. 

이제 운송기기는 우리 사회에 절대 없어선 않될 하나의 필수적인 것이 되었고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에도 운송기기는 여전히 존재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과 자연을 위해서는 전기자동차를 넘어선 새로운 환경과 인간을 위한 운송기기에 대한 개발이 필요 하다. 

9.1.14

재료에 대한 이해

알루미늄

 알루미늄은 현대의 생활에 필수적인 재료가 되었고 이 재료는 우리생활 구석구석 들어와 있지만 우리는 알루미늄이 우리 생활과 환경, 경제 등의 분야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미디어와 이 사회가 만들어낸 습관적이고 표면적인 이미지로 알루미늄이라는 재료를 남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제사회는 환경보존을 위해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co2배출 규제를 하는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알루미늄생산과정에서 파괴되는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한것처럼 보인다. 

알루미늄은 우리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중 하나이다. 그 중 알루미늄 캔은 우리생활에 가장 친밀한 알루미늄이고 20세기의 라이프스타일과 함께해왔다.
20세기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알루미늄이 사용됨으로서 알루미늄산업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점차 알루미늄의 역할들이 플라스틱으로 대체 되었고 플라스틱은 점차 다양한 산업군에서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사용범위가 넓어지고있다. 이런 플라스틱이 지금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 나아갈 것이며, 어떤 변화가 일어날것 인가?

알루미늄이라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이 재료가 우리 생활 깊숙히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기존의 금속보다 가볍고 내구성이 좋다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알루미늄은 생산과정에서 많은 전력이 소모될 뿐 만 아니라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여러 물질을 배출한다. 하지만 많은 기업들은 알루미늄을 사용하게 되면  에너지를 줄일수 있고 실용적이라는 점 때문에 알루미늄은 필요한 재료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사회는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어도 단 하나의 이점이 있다면 이 이점을 극대화 하기위해 노력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 한다. 왜 이런 모순들이 생기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알루미늄생산에 한해 사용되는 에너지는 전세계 총전력량의 2%를 차지한다. 그래서 알루미늄공장은 전기를 보다싸고 안정적으로 공급할수 있는 발전소 주변에 위치한다. 
많은 에너지 기반 산업들은 화학연료에서 전기에너지로 변경하며 전기에너지의 사용이 환경을 위한 것 이라고 광고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전기를 생산하는 것을 살펴보면 전기가 자연친화적인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것인지 잘 모르겠다. 수력발전은 주변환경을 파괴하고  원자력에서는 방사능물질을 내뿜으며, 화력발전소에서는 매일매일 co2생산해 낸다. 즉 우리가 환경 친화적인 에너지라고 생각 하는 전기에너지도 결국에 그 생산과정에서 환경을 파괴한 대가가 아닐까?

현재 알루미늄 생산공장의 대부분은 남반구에 위치해 있다. 그 중 브라질의 아마존은 세계의 알루미늄 생산의 많은 양을 생산하고 있지만 이 알루미늄들은 대부분 북반구에 위치한 국가들이 소비를 하고 있다.
많은 기업들은 개발도상국에 공장을 짓고 개발도상국들은 이를 적극권장하며 이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아마존의 문제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기업들이 개발도상국에 호텔을 세우고 공장 등을 세워 자원과 노동을 착취하고 그 나라의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알루미늄은 우리 생활에 빠져서는 안될 정도로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생활에 필수적인 재료가 되었다면 사용률을 줄이는 것보다는 가장 효율적이고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에도 수많은 제품들이 새롭게 쏟아져 나오지만 그만큼 사람들은 쓰레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렇듯 쓰레기는 이 사회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쓰레기는 어떤영향을 이 사회에 주고 있는것인가?

플라톤의 정치철학

플라톤의 대화편에 대한 생각

페이지(대화편 2부 p268,269)에서 플라톤은 국가의 덕목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서 정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사람보다 행복한가 대하여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와의 대화를 예를 들며 국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이 페이지에서 플라톤은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기능을 잘하는 것이야말로 조화이고 행복한 국가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그 당시의 개인적 상황과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개인적인 상황을 살펴 보면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는 모습을 보았고 그의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영혼을 영혼불멸하다고 생각면서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았다. 또한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이며 그래서 현실은 불확실한 우연의 세계로 우연성의 세계를 규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이데아를 직관하려고 해야한다고 생각 하였다. 
또한 플라톤이 활동하던 당시의 국가의 개념은 지금의 국가의 개념과는 다르게 그 당시에 국가를 살펴 보면 하나의 도시를 중점으로하는 도시국가형태가 대부분이다. 이 당시 도시국가는 다른 지역의 부족, 씨족사회와는 다르게 혈연이 아닌 여러지역에서 유입되어 정착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국가이기 때문에 친인척 공동체 사회와는 다르게 국가는 서로 다른지역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사람들로 구성이 되기 때문에 이들간의 질서를 유지하기위해 규율이 중요한 역활을 하게 되었고 국가는 이러한 규율을 만드는 지배계층과 외부의 위협과 규율을 집행하는 군인계층이 있었을 것이고 그외에 음식과 무기등을 만드는 생산자계층으로 크게 3계층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런 도시국가중 가장 강성했던 아테네에서 태어났고 또한 그는 지배계층의 자제로 태어나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가 국가를 살펴본바에 의하면 국가는 분업의 원리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는 그의 철학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을 통해 그의 정치철학에 대하여 살펴 본다면 우선 인간을 지배자, 군인, 생산자로 분류하였고 지배자의 덕목은 지혜, 군인의 덕목은 용기 그리고 생산자의 덕목은 절제로 정하고 이 세 계층이 각자의 기능(역할)을 잘 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그가 생각했던 이상적 국가모델이었다. 지배자의 덕목인 지혜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궁국적인지혜를 뜻하고 생산자의 덕목인 절제는 생산자 뿐만아니라 군인, 지배자들 또한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다. 플라톤은 지혜, 용기, 절제중 지혜를 중요하게 생각 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에는 소크라테스의  알면 곧 행할 것이라는 지덕합일설이 영향을 주었지 않을까 한다. 이런 지혜를 지배자는 항상 추구해야하고 또한 자신의 지혜를 다른계층에게도 지혜를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플라톤이 본 그 당시의 지배계층은 겉모습만 아는듯 보이려 할 뿐 자신의 욕심만챙기려 한다고 생각을 하였고 그래서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지배자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이 정치를 하고 왕 또한 철학을 해야한다는 철인정치를 주장한다. 이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플라톤은 디오니쉬오스 2세의 요청에 의해 자신의 철인 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끝내 실패 하고만다. 그 이유는 그의 철인정치는 현실성이 부족한 이상적인 국가관이였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국가관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의 국가관에서는 자유와 변화는 조화를 깨는 부정적인 것이고 보편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개개인은 보편적 가치과 역활에 맞게 톱니바퀴처럼 자신들의 기능을 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국가로 보여진다.  이러한 필연적 국가관은 계층간의 이동이나 변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즉 모든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것과 자신의 일은 당연한 것이고 각자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자신의 일만하면 된다는 변화화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국가에서 개개인은 자동차를 작동하게 하는 하나의 부품과 다를것이 없는 존재이다. 
 

생각의 단초

하나와 연결

생각의 시작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하나이다. 시점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 보이거나 모두 분리되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보이는 저 의자와 책상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 하지만 100미터 뒤에서 바라보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더 멀리 떨어져서 본다면 이 둘은 분리되어 보이지 않고 하나로 보인다. 시점을 어디에 놓고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하나로 보이거나 혹은 모두 하나이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것들은 물리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고 또 어떤 것 들은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사물과 동물, 자연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존재한다. 서로 주고 받음이 연결이다. 연결은 접촉으로부터 시작 된다. 접촉은 물리적, 사회적, 순간적인 것, 지속적인 것이 있다. 그리고 접촉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일어 나고 있고 사라진다. 접촉은 때로는 속박하고 억압하지만 언제라도 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끝없는 접촉하는 세상에서 살아 가고 있다. 사회적인 접촉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 난다. 물리적인 접촉은 동물과 사물, 자연에 사이에 일어난다. 사회적 접촉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쁜 접촉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접촉은 우리를 속박한다. 하지만 속박은 의지와 생각에 의해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감관기관에 의해 접촉을 인지 할 수 있다. 감각을 하나씩 지운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접촉을 점점 우리는 느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더라고 접촉과 연결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된다.
물리적 접촉에 대하여
물리적 접촉이라고 한다면 일단 나와 무엇인가의 접촉을 말할 것이다. 물리적 접촉을 일으키는 것은 생물과 사물로 나눌 수 있다. 생물은 단세포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 까지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다. 그 중에 인간들 사이에 접촉은 살과 살이 닿는 것이다. 살과 살이 접촉하면 우리 몸에는 다양한 반응이 일어 난다. 그것이 때론 성욕이 되기도 하고 불쾌감, 부드러움 등의 다양한 감각이 생겨난다. 나는 누군가와의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과의 접촉이 나에게 주는 감각은 이질감과 때로는 불쾌감을 준다.
사회적 접촉에 대하여
사회는 자연사회와 인간사회가 있다. 인간사회에서 접촉이라고 하면 나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고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모여 사회를 이루어 살아간다. 이런 사회와 나의 접촉이 사회적 접촉이다. 사회적 접촉은 사회가 나에게 주는 감각이다. 이 감각도 다양하다. 예를 들어 가족사회가 주는 감각은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숨막히고 구속하기도 한다. 이런 사회로부터 나는 항상 불안과 신경과민 그리고 공포를 느낀다. 사회는 공간과 상황의 결합이다. 이 방은 공간이다. 그리고 이 공간 안에는 어떤 상황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있다. 이 방밖에 건물이 있고 그 밖에는 자연이 있다. 사회는 방, 건물, 자연 모든 공간에 있다. 그리고 공간 안에서 상황이 생겨난다. 공간은 항상 그곳에 있고 변하지 않지만 그 공간 안에 있는 나는 다양한 감각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감정의 변화의 이유는 공간과 상황 때문이다. 때론 일상적인 공간은 나에게 신경과민과 불안, 공포를 느끼게 하고 이런 감각은 공간과 상황 즉 사회로부터 생겨난다.
공간과 상황에 의해 인간이 느끼는 감각은 다양하고 사람마다 다르다. 그 중 어떤 공간과 상황은 우리에게 공포와 불안, 신경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움직일 수 없는 어두운 공간, 비좁은 공간, 모두에게 노출된 공간등과 같이 우리는 어떤 공간과 상황에 의해 신경과민증상을 보인다. 어떤 사람은 엘리베이터의 밀폐되는 공간에 공포와 불안을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아무도 없는 텅 빈 넓은 공간에서, 어두운 지하실과 어둡고 칙칙한 냄새로부터 공포와 불안감을 느낀다.

표현에 대하여
나의 신경과민에 대해 표현
1. 공간을 계획한다. (어떤 공간인가?) 
2. 공간 안의 상황을 계획한다. (어떤 상황인가?)
상황: 사람으로 가득 찬 자동차의 뒷자리에 겨우 한 사람만이 탈수 있고 움직일 수 없는 비좁은 공간(움직일 수 없는 답답함과 공포), 전등이 깜빡 거리고 고요한 공간,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공개된 공간(보여지는 것에 대한 신경과민), 카메라의 깜빡이는 불빛(누군가 나를 보고 있음에 대한 신경과민)등
색감- 하얀색,
향기: 소독약냄새(병원),
표현 방법= 입체- 체험 혹은 경험을 통해 비슷한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불러일으킴
영상-
페인팅-
영상+입체, 페인팅+입체의 결합
공간을 연출해서 감각을 공유 혹은 체험

나에게는 턱에 어릴적 경운기에 다친 상처가 남아있다. 아직도 사고당시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이 사고의 여파로 나는 빠르게 회전하고 소리를 내는 것에 잘 처다보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을 보면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로 불안하고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는것이지만 그것과 나와의 관계에 따라 사람은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안도를 느끼기도 한다.

장미의 이름

장미의 이름을 통해 중세를 이해하고 현재를 보자

"장미의 이름"은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바탕으로 영화화 되었다. 이 소설은 십자군전쟁 이후 14세기 중세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이탈리아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중세유럽을 묘사하고 있다.
십자군전쟁은 중동과 유럽의 역사상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로 당시 유럽의 경제적와 정치, 종교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전쟁을 하게 되었고 전쟁을 통해 비잔틴제국과 중동의 재물들과 예술품, 책등을 약탈함으로서 암흑기의 유럽사회에 변화를 일으켰으며  르네상스와 과학, 정치체제등이 발달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오랜시간동안 지속된 전쟁이 실패하면서 교황중심의 절대권력이 점차 와해되어 갔고 각 지역의 왕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해 나감으로서 교황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시작하는등 유럽사회 전역에서 변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에코는 이런 혼돈과 변화의 중세를 수도원의 살인사건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중심인물인 윌리엄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계관을 추구하며 철학과 지혜를 중요하게 여기고 합리적이고 경험적으로 판단하는 인물이다. 또한 이성과 신앙을 동등한 위치에서 혹은 이성이 신앙보다 더 우위에 놓고 생각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윌리엄과 대립 구도인 호르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세계관을 추구하는 전통적인 인물로 이성보다 신앙을 우선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또 지식은 그저 옛날이나 지금, 미래에도 그저 반복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은연중에 이성에 가지고 있는 힘을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며 지식에 탐독하는 사제들을 살해 한다. 이런 태도는 아마도 이성을 추구 하게되면 신에 대한 믿음이 옅어지면서 결국에는 기독교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면서 이에 대한 공포가 점차 신을 광신하게 된것은 아닐까? 즉 그는 중세시대의 권력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이 둘을 통해 보여지는 대립은 전쟁이후 중세시대의 가톨릭 내부에서 시작된 분열과 다툼을 윌리엄과 호르헤라는 인물들로  대표하여 보여주고 있고 마지막에는 결국 호르헤의 죽음응 통해  로마카톨릭의 긴 암흑위 시대가 끝이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것을 암시하고 있는듯 하다.
그리고 당시에 기독교에서는 신과 성경의 해석에 대해 사소하고 불필요한 논쟁을 하고 있는 가톨릭교회 내부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으며 사회는 급 변화해 감에도 당시 가톨릭은 현실적인 변화보다는 사소한 논쟁을 하는 모습은 마치 급격히 변화하는 국제사회 속에서 주기론 과 주이론의 성리학적 이념에 대하여 논쟁만을 하던 조선말기의 정치와 닮아있는듯 하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을 이단 심판관인 베르나르 기가 서민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수도원과 그 밑에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로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는 농가의 서민들의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높이 쌓아 올린 성벽과 그 밑에서 살아가는 서민은 수도원과 서민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즉 서민들과 수도원의 관계는 그저 곡식을 받치는 일방적인 관계일 뿐 그외에 어떠한 교류도 없이 각자의 삶을 살았던 중세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장미의 전쟁은 실데 중세시대의 말기가 어떠했을지 잘 보여주고 있다. 십자군전쟁이후의 유럽은 급격히 흔들리는 가톨릭의 지위, 전쟁으로 부를 쌓은 상인, 그리고 새로 유입된 지식들로 인해 점차 변화해 왔으며  마침내 이런 변화는 지금의 유럽의 문화를 이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체되어 있고 혼란스러운 현재의 사회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소유와 자유 그리고 평등

소유와 자유 그리고 평등은 공존 가능한가?

소유와 자유는 서로 충분 조건이 될 수 없고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유와 자유를 위협 하는 것은 평등이다. 현재 정부는 복지라는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근본인 소유권과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평등
국가는 결국 인간의 협의에 의해 구성된다.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정치인들은 소수의 이익이 아닌 최대다수를 위한 최대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즉 다수의 이익을 보장해 주어야만 정치인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이는 특정 다수의 이익집단에 의해 소수는 자신의 소유권과 자유를 침해 받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와 정치인들의 권력은 점점 더 커지며 국가 자체도 자신들의 이익 위해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권력을 얻기 위해 대중들에게 포퓰리즘적인 복지를 약속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하는 듯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다수를 속이고 이런 정치가들은 강화된 정부의 통제권을 이용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등 점차 현대사회는 모순으로 가득해져 가고 있다. 작년에 재래시장을 살린다는 이유로 대형 할인마트의 영업을 규제 법안이 통과 되었다. 재래시장 상인들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실행된 이 법안은 참 아이러니하다. 대형 할인마트는 자본주의적 생산체계와 운송체계로 재래시장보다 가격이 저렴하면서 품질이 좋고 위생적이며 체계화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주차, 위치 등등 여러 가지로 현대인들이 소비하기 쉽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재래시장 보다는 대형 할인마트를 많이 찾는다. 하지만 재래시장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자본과 생산유통 구조 차이에 의해 대형 할인마트로부터 자신들의 경제적 자유를 침해 한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정부는 이런 재래시장의 소상인들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과 평등의 실현 이라는 이유로 대형 할인마트의 영업을 규제 하는데 이것은 대형 할인마트의 소유자들뿐만 아니라 대중 소비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침해한다. 즉 현대 민주주의 정부는 공공선을 위해 소수가 희생될 수 밖에 없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특정이익 집단의 권리보호를 위해 다수가 희생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 대부분의 후보자들이 복지국가를 실현하겠다는 공약을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복지국가와 개인의 자유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즉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복지국가의 개념은 결과적으로 사회를 더욱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럽게 만들었으며 더 많은 모순을 만들어 냈다.
평등은 자유를 침해 해야만 이룰 수 있고 자유는 평등하지 않아야 이루어진다. 그래서 평등과 자유는 서로 반비례한다. 이처럼 평등은 많은 철학자들과 사회 이론가들의 사유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낸 이상적인 개념이다. 자연상태에서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너무나 불평하다. 즉 토지라는 개념은 보편적인 토지를 일컫지만 실제 자연의 땅에는 똑 같은 토지는 존재 하지 않는다. 사막과 기름지고 비옥한 토지는 다르기 때문에 그 가치 또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야생의 동물들 또한 각각 다를 뿐만 아니라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진리에 의해 각자 불평등한 위계를 가진다. 즉 이러한 불평들의 원인은 자연을 이루는 모든 것들에는 차이(다름)이 있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평등은 성립될 수 없다. 이런 평등의 개념은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보편적 진리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 된다. 이상주의자들은 인간의 특징과 특성을 무시하고 국가(사회)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인간을 관찰하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특성만을 도출해 내고 이것을 바탕으로 평등한 사회를 주장 한다. 하지만 이렇게 편향된 시점의 사상과 정치는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 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편적인 특징으로 모두 인식될 수 없다. 인간은 예측불가능하고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친 현실주의적인 것 또한 지향해야 한다. 현실만 봐서는 이 사회는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유와 자유
나는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로서 생각하는 아담 스미스와 토마스 홉스의 생각에 동의한다. 소유는 인간의 이기심으로부터 발생하는 욕구이다. 소유욕은 인간뿐 만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도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그래서 소유는 가장 자연적인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소유에 대한 본능은 태어나면서부터 있는 것이고 아이가 점점 사회구성원들과 자라면서 이런 본능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고 사회에 의해 억압 된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는 평등이 아닌 위와 소유권으로부터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무엇인가를 소유한 사람은 자유인이었고 자유인은 무엇인가를 소유하였다. 그리스 시대에는 자유인 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이들은 정치적 자유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파라오는 자신의 영토의 모든 인간과 땅을 소유 했고 오직 그만이 자유를 얻었다. 이런 인간의 소유의 대상은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물질은 유한하고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으며 양으로서 환산이 가능한 것에 대해 인간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상 발생했던 많은 전쟁과 투쟁은 좀더 많은 것(노동, 토지, 금, 철 등)을 소유하기 위한 것 이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무형적인 것(지적 생산물, 과학 등)까지 소유하기 시작 했다. 왜냐하면 무형적인 소유로 더 많은 물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신들의 사적 소유를 강화해 나아가면서 자본주의경제까지 구상해 낸다. 하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너무 지나친 소유권강화에 의해 사회는 점차 양극화 되었고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적 문제의 원인으로 사적 소유를 주장 하였고 소련의 사회주의 세력은 공동소유를 주장 하며 사적 소유를 없애는 공산주의로 발전 하였다. 하지만 20세기초 자본주의와 다른 길을 가던 사회주의 체제에서 공공선이라는 명분하에 정부는 개인의 소유권을 없애고 자유를 자주 제한 했지만 경제적 실패로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사적 소유를 없앤다면 모든 인간을 불평등으로 몰아 넣는 사회악은 없어 질 것이라는 이상은 환상이라는 것이 증명 되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소유한 것이 많아질수록 그 개인은 더 많은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또한 여전히 모순에 빠져 많은 문제를 양산해 내고 있다.

결론
자유와 평등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상위 개념이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의 관계와 같다. 현대 사회는 자유를 최고의 가치를 두고 성장해 왔다. 하지만 자유로 치우친 현대사회는 결국 소유(경제)에 대한 불균형을 초래하였고 생산자계층의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은 이런 불균형적 소유에 반대하며 인간의 권리와 평등을 주장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가의 역할과 힘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이렇게 현대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다시 서로 충돌하면서 이 사회는 또 다른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인가가 아닌 이 둘을 어떻게 결합 시킬 수 있는가? 혹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넘어서 인간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상위 개념의 가치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즉 우리는 이제 절대적 자유와 평등은 이루어 질 수 없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다양성을 인정한 새로운 혹은 진보된 사상이나 혹은 정치를 탐구해 낳아 가야 한다.